녹슨 탱크 속에서 우리 영감 환히 밝혀보기

녹슨 탱크 속에서 우리 영감 환히 밝혀보기
– 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 탐방기

문화비축기지 전경

문화비축기지 전경

서울월드컵경기장 맞은편에서 그간 베일에 싸여 있었던 공간 석유비축기지가 도시재생을 통해 문화비축기지로 되살아났다. 유신정권 시절 석유파동이 만들어낸 1급 보안시설이 서울시민들에게 열린 문화·축제의 장으로 새 옷을 갈아입은 것이다.

문화비축기지로 찾아오면 이곳에서 열리는 갖가지 이벤트를 누릴 뿐만 아니라 스스로 기획하고 대관해 본인만의 즐길 거리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 가벼운 산책로로도 제격이다. 이만하면 군침을 흘릴 만하지 않은가. 이곳을 직접 한 바퀴 돌아봤다.

문화비축기지에는 곳곳에 산책로가 뻗어 있다

문화비축기지에는 곳곳에 산책로가 뻗어 있다

문화비축기지 밖 매봉산으로 통하는 등산로

문화비축기지 밖 매봉산으로 통하는 등산로

마포 사회적경제 공동작업장 전경

마포 사회적경제 공동작업장 전경

 

과거의 낡은 유산과 창조적인 미래가 공존하는 곳

맨 처음 모습을 비추는, 문화비축기지 한가운데를 차지하는 너른 마당에도 이름이 있다. 0번 탱크, 즉 T0이다. 이곳 문화마당은 대규모 야외 행사가 가능하도록 넓은 평지와 더불어 살짝 그리고 넓게 솟은 무대까지 마련돼 있다. 현재는 들어오자마자 심심해할지 모를 방문객들을 맞이하듯 돛단배와 사다리 등 몇몇 조형물이 비치된 상태다.

그 오른편, 서울월드컵경기장과 맞닿은 방면으로는 웬 컨테이너와 일반 가옥이 레고 쌓듯 함께 모인 건물들이 보일 것이다. 이곳은 마포 사회적경제 공동작업장으로 마포 사회적경제지원센터와 함께 도시재생과 문화예술 및 공정무역과 관련된 5개 기업이 입주한 상태다.

기업들로는 수공예 디자인 사업을 주로 하는 공기핸드크래프트를 비롯해 반려동물·핸드폰 관련 사업장 굿바이, 홍대 앞 문화예술 협업 중심의 홍우주사회적협동조합, 문화예술단체 협업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문화예술오픈스쿨, 공정무역 커피 판매 관련 교육을 실시하는 마포카페네트워크 트립티가 있다.

넓디넓은 T0의 전경

넓디넓은 T0의 전경

T0에 전시된 돛단배

T0에 전시된 돛단배

문화비축기지에서 발간한 <비축생활> 2017년 겨울호에 따르면 “T5의 이야기 전시관에서 문화비축기지의 역사와 조성 과정을 살펴본 후 나머지 탱크를 구경하면 이해도가 쑥쑥 높아진다”고 조언했다. 뭐든 알고 봤을 때 더 재미난 법 아니겠는가. <비축생활>의 안내대로 우측 설비동을 지나 T5 이야기관부터 들어가봤다.

전시관의 절반은 과거 보안시설이었던 석유비축기지로서의 역사, 절반은 시민들에게 개방된 문화비축기지로서의 변천사를 담았다. 벽면을 활용해 시간 순서대로 쉽게 이해하게끔 잘 정리돼 있기에 한 번쯤 가볼 만하다. 이곳의 특징은 위층에 마련된 탱크 외부공간이 주요 관람 장소였다는 점이다. 탱크 내부공간도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볼 수 있지만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미스테리함으로 가득한 느낌이었다.

원형으로 한 바퀴 돌며 구경할 수 있는 전시장

원형으로 한 바퀴 돌며 구경할 수 있는 전시장

창 너머로 보이며 호기심을 자극하는 탱크 내부 전시물

창 너머로 보이며 호기심을 자극하는 탱크 내부 전시물

이어서 바로 왼편에 쌍둥이처럼 이웃한 T4 복합문화공간에 들렀다. 필자가 들렀을 때에는 크게 행사가 없어 적막하다 싶을 정도로 조용했다.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며 T4의 탱크 외곽을 한 바퀴 돌던 중 갑자기 “철커덩!” 소리와 함께 철제 자동문이 스르르르르 열렸다. 덕분에 내 심장까지 크게 철렁였다.

거대한 내부는 벽면 일부에만 관람객들을 위해 간접조명과 벤치가 설치됐을 뿐 나머지 바탕은 석유탱크로서의 본모습 그대로였다. 과거의 유산과 미래를 지향하는 디테일이 교묘하게 뒤섞인 한가운데에 서 있으니 마치 SF영화에 나오는 단 한 명의 우주인이 된 기분이었다. 아무 장식물도 없는 공간 자체에 압도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T4의 외부 전경. T5와 닮았다

T4의 외부 전경. T5와 닮았다

T4의 내부. 각종 문화행사 기획이 가능하다

T4의 내부. 각종 문화행사 기획이 가능하다

T3, 3번 탱크는 그냥 탱크다. 잔디밭과 돌계단이 깔린 언덕 위에 홀로 쭈그려 앉아 세상을 관망하듯 남아 있는 이곳을 문화비축기지는 유독 원본 그대로 보존해뒀다. 아니, 봉인이라고 해야 맞을지도 모르겠다. 입구와 탱크 본체 사이에 놓인 짧은 철제다리 외에는 관람객들을 위한 어떤 동선도 T3에서만큼은 허락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신기함이 가득한 문화비축기지에서 이곳 원형탱크는 신비주의의 끝을 달린다. 그렇대도 T3 앞에서 내려다보이는, 서울월드컵경기장과 T0가 함께 어우러지는 경치는 퍽 아름다우니 사진 한 장쯤은 꼭 남겨두자.

언덕 맨 위에서 내다본 경치. 미세먼지만 없었어도

언덕 맨 위에서 내다본 경치. 미세먼지만 없었어도

 

디자인, 아이디어 면에서 영감 얻기에 제격인 곳

언덕에서 내려와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좌측으로 전진하면 그 앞에 T2와 T1 그리고 T6가 비스듬한 이등변삼각형 같은 각도로 눈앞에 드러난다.

T2는 공연장이다. 내부는 실내공연장, 옥상은 야외무대로 이뤄져 있다. 이 노천극장의 설계 역시 독특했다. 탱크를 가리던 콘크리트 옹벽의 일부는 야외 공연장의 배경으로 새 역할을 받았으며 기하학적인 느낌으로 설치된 정사각형 모양의 흰 의자들은 내가 외계의 제단에라도 왔나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유리탱크 천장과 매봉산 그리고 피아노의 조화

T1 내부, 유리탱크 천장과 매봉산 그리고 피아노의 조화

T2 야외공연장, 공연자의 시각에서 올려다본 객석 방면

T1은 파빌리온(Pavilion)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관람객을 빨아들이는 사다리꼴 형태의 문화통로를 통과하면 유리로 이뤄진 새 탱크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아래 한가운데에는 웬 피아노 두 대와 악보가 놓여 있고 말이다. 투명하고 거대한 유리탱크, 그 뒤로 비치는 곧 녹색이 될 매봉산의 일부, 거기에 화려하게 채색된 피아노들까지. T4에서 겪은 묘한 조화는 T1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이어진다.
T6의 외부 전경. 유일한 신축 건물이며 규모도 가장 크다

T6의 외부 전경. 유일한 신축 건물이며 규모도 가장 크다

마지막으로 찾은 T6 커뮤니티센터는 문화비축기지의 주요 탱크들 중 유일한 신축물이다. T1과 T2의 탱크를 해체하고서 그 자재를 활용해 재조립했다. 그 모양새는 거대한 쉬폰케이크를 연상시킨다. 이 글을 읽고 있을 메이커 독자들이 수시로 대관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곳 중 하나가 바로 여기다.

cafeTANK6. 안쪽으로 더 많은 테이블과 회의공간이 있다

cafeTANK6. 안쪽으로 더 많은 테이블과 회의공간이 있다

위층 창의랩과 강의실을 잇는 통로. 경사면으로 돼 있다

위층 창의랩과 강의실을 잇는 통로. 경사면으로 돼 있다

입구로 들어서면 카페탱크6라는 이름의 카페와 모임용 테이블들이 보이고 한가운데에는 원형 회의실이 위치해 있다. 위로 올라가서는 나선형으로 된 경사로가 뻗어 창의랩, 강의실 그리고 원형 옥상 공간까지 연결해준다. 문화비축기지 중 안 그런 곳이 어디 있겠느냐만 유달리 T6에서 건물을 탐구하며 다닌다는 느낌을 충만히 얻어갔다.

T6, 쉬폰케이크의 뚜껑(?) 옥상마루

T6, 쉬폰케이크의 뚜껑(?) 옥상마루

 

40여 년의 침묵을 깨고 개방된 길 그리고 공간 

문화비축기지는 T1부터 T6까지 이르는 실내 공간 외에도 T0를 중심으로 한 산책로 또한 잘 돼 있어 가벼이 숨 돌리기에 제격이다. 계단 없이 완만한 경사로 널찍하게 깔린 탱크 주변 도보도 거닐어보고 시간 여유가 충분하다면 빙 둘러 매봉산을 지나는 등산로도 체험해보자.

문화비축기지는 공간이 필요한 이들에게 장소를, 휴식이 필요한 이들에게 안식처를, 창작이 필요한 이들에게 독특한 영감을 제공하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곳이다. 기존의 평범한 일상에 싫증나기 시작한 당신이라면 한 번쯤 꼭 방문해보길 권한다. 문화비축기지에 대해 더 자세한 이용안내 또는 대관문의를 구한다면 문화비축기지 홈페이지 또는 전화(parks.seoul.go.kr/culturetank, 02-376-8410)로 연락하면 된다.

글: 장지원 기자